내려놓음

2020. 12. 6. 01:53미니멀리즘


어릴 적 나는 짠순이었다.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전화비를 아낀다고 전화선을 다 뽑아놓고 집의 전등은 한 군데만 남겨놓고 다 꺼버렸다. 내가 하도 불을 끄고 다니니 집에 놀러온 사촌 오빠가 말했다.

"야~~ 형광등 종일 켜놔도 100원도 안 나온다~~"

이 말을 듣고 난 뒤로는 일부러 전등을 끄고 다니지 않았지만 방을 나올 때 습관적으로 불을 끄는 것은 여전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라 한 여름에 동생이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서있으면 달려가서 닫기 바빴고 화장실 변기물은 소변을 몇 번 모아서 내렸다. (지금의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

당시 집전화 기본료가 2,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명세서에 전화료가 5천원 정도 나왔던 걸 보고 혼자 굉장히 뿌듯해했고 그 뒤로는 더 열심히 전화선을 뽑고 다녔다.

수도꼭지를 풀파워로 튼 적도 없었고 두 겹짜리 휴지는 한 겹씩 분리해서 썼다. 친척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도 과자 하나 안 사먹고 장농 이불 사이에 숨겨놓았지만 한 번도 꺼내쓴 적이 없는데 사라져있는 마법을 경험하기도 했다... ㅋㅋㅋ

초등학교 시절엔 딱히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학교도 걸어다녔기 때문에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다녔다.


그 나이에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다기 보단 그냥 학교에서 배운대로 실천했던 것 같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하라고 배웠고 쓰지 않는 방의 전등은 끄라고 배웠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오존층을 파괴하는 가스가 나온다고 배웠고 물을 아껴쓰라고 배웠다.


​지금이야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하고 3겹 짜리 휴지를 분리하지 않고 쓰는 사치도 부리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사람이 없는 방에 불이 켜져있거나 물을 풀파워로 틀어놓은 소리가 들리면 괜히 신경이 쓰였다.

목적 없이 켜져있는 티비, 아무도 없는데 돌아가는 선풍기, 한 시간 이상 가동되는 에어컨, 하루 종일 꽂혀있는 전기 밥솥 등은 모두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의미없이 자원이나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이 싫었다.


내 기준에서 티비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재미있는 것이 나오면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시청할 때만 시간에 맞춰 틀어야 하는 것이고, 에어컨은 폭염주의보가 내려서 숨이 턱턱 막히는 정도가 되어야 틀어야 하는 것이고, 겨울에 전기 스토브는 샤워하고 나와서 옷갈아 입을 동안만 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여름날,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서는 티비도 안 킨 조용한 집에서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땀을 한 바가지 흘려도 혼자 있을 땐 에어컨을 켜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선풍기를 미풍으로 틀어놓고 그 앞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느덧 몸의 열기가 가라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마자 덥다고 에어컨을 켜면 내가 얼마 안 있어서 온도를 28도로 올려놓는다. 남편이 바깥이 더 시원하겠다며 궁시렁거리면 좀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내가 선심쓰듯 에어컨 온도를 다시 낮추면서 꼭 한 마디를 한다.

"요즘 사람들은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부터 켠다니깐~~ 옛날엔 어떻게 살았대~~~"

(나보다 나이 많은 남편은 이 말이 얼마나 우스울까..)


남편이 샤워할 때 온수가 나올 때까지 물을 틀어놓고 있으면 나는 이걸로 바닥청소라도 하라고 잔소리를 하고, 양치질 하면서 물을 틀어놓고 있으면 바로 잠궈버린다.

남편은 전기밥솥의 코드를 빼놓아 식은 밥을 전자렌지에 돌려먹는 것이 싫단다. 냉동밥도 싫단다. 그래서 남편이 출근하면 밥솥 코드를 빼놓았다가 퇴근하기 한두시간 전에 다시 꽂아둬야 하는데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다.

(결국 맨날 까먹어서 식은 밥이 된다.)

아이를 키우는 집은 보통 따뜻하게 해놓지만 우리집은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만 보일러를 돌렸고 어떤 날엔 돌리지도 않았다.
(그나마 요새는 집 온도를 22도 정도로 유지한다.)


이런 일로 다툰 적은 없지만 이런 것 때문에 둘 사이에 얼마 간의 긴장감이 감도는 느낌이었고 남편이 뭘 하려고 할 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물을 풀파워로 틀었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 이걸로 혼낸 적도 없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기준을 고집하며 가족들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과금을 몇 푼 더 내더라도 원하는 호사를 누리게 두는 것이 서로의 정신건강에 더 이롭다.

무엇을 하든 주위와 조화를 이루고 마음이 편해야지, 옆에 사람을 쪼아가며 긴장감을 유발하면서까지 아끼려고 하는 것은 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도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



코로 들이쉬고, 씁~~~~~
입으로 내쉬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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